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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평]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작성자 손여정 등록일 2015.10.30

아들이 아버지의 손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고 만 임오화변. 너무나도 유명한 조선시대 비극의 부자, 영조와 사도세자. 영조 시대의 조선 시리즈 8권,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에서는 영조와 사도세자 두 부자의 성장과정을 통한 그들의 성격, 사도세자가 얻은 정신질환, 결국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죽게 하고 만 임오화변이라는 비극까지, 부자父子이자 군신君臣이기도 한 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영조의 성장과정은 편치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이복형 세자가 있었고, 세자의 어머니 희빈 장씨는 연잉군의 어머니 숙빈 최씨를 시기·박해했으며, 희빈 장씨가 죽고 난 뒤에도 숙빈은 출신이 미천하여 궁궐 안에서 푸대접을 받았다. 연잉군 역시 형식적으로는 여러 어머니를 모시며 여러 명문가가 그의 외가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남이나 마찬가지였고, 부왕 역시 세자와의 관계 등으로 연잉군과 가까이 지내지 않았기에 연잉군에게 가까운 피붙이라곤 숙빈뿐이었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며 부대끼기보다 생모에게 집중적이고 강력하게, 고립적이고 편향적으로 사랑받은 영조는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은 매우 집중적이고 강력한 것으로 표현하였고, 여타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랑이 형식에 그치거나 적대적인 미움으로 바뀌었다(p.21)'. 영조가 화평옹주와 화완옹주를 몹시 아끼지만 사도세자와 화협옹주에게는 매정했으며, 생모 숙빈과 세손을 아끼고 부왕 숙종과 아들 세자는 그저 그렇게 대한 성격의 근원은 이러한 성장환경에서 유래했던 것이다.


사도세자는 익히 잘 알려져 있듯이 외동아들 효장세자를 잃은 영조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이었다. 후사를 장담할 수 없던 상황에서 태어난 새로운 후계자는 태어난 지 백 일이 지나자 생모의 품에서 경종이 거처했던 저승궁으로 보내진다. 세자로서의 체통을 위해서라지만, 겨우 백 일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부모 품에서 떼어놓은데다 아이를 양육하는 저승궁 나인들을 불편하게 여겨 부모는 아이의 관계가 멀어지기까지 했다니 정상적인 양육은 아니었던 듯하다세자가 7세가 된 뒤에야 영조는 문제가 되는 나인 몇 명을 쫓아보내고 저승궁과 가까운 곳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그 후에도 세자는 계속 저승궁에서 나인들에게 양육되었다. 경종을 모시던 저승궁 나인들은 평소 영조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세자의 생모를 깔보았으며, 세자를 책임을 가지고 양육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것을 따라주고 순간순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다. 주변에 적대적인 이들이 있다 해도 절대적인 아군이자 사랑을 쏟아주는 생모가 있었던 영조와는 퍽 다른 환경이었던 것이다. 한편, 교육 면에 있어서는 지나칠 만큼 철저했다. 돌이 될 무렵에 시강원을 설치하고, 두 돌이 지나자 정규 수업인 서연을 열어 체계적으로 공부하도록 했으며, 8세에 성균관 입학례를 치렀다. 자신이 공부를 못 한 만큼 아들은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려는 건, 여느 부모와 다를 것 없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세자는 영조의 기대만큼 공부를 좋아하고 잘 하는 아들이 아니었다.


영조는 스스로 대훈大訓, 상훈常訓, 자성편自省編, 심감心鑑 과 같은 책을 써서 세자에게 주면선 훌륭한 임금이 되는 데 필요한 자질을 열심히 갈고닦을 것을 당부했다. 그런데 그가 세자에게 써 준 책은 대부분이 자기 자랑에 가까운 내용들이어서 세자에게 오히려 부왕에 대한 부담만 지워 주었다. (……) 영조와 세자는 성격이 달라서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영조는 세자에게 못마땅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세자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사도세자는 자라면서 주위로부터 칭찬을 듣는 일이 많지 않았다. (……) 결국 세자는 부왕이 요구하는 세자로서의 모습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부왕이 요구하는 것과는 반대의 모습을 갖게 되면서 사도세자는 부왕에 대한 두려움과 죄의식을 갖게 되었다. 또한 세자는 부왕이나 주위의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도 깊은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다. - p.43~44

아버지는 아들에게 정을 쏟기보다 요구가 앞섰고, 기대에 비해 성취가 미진하자 감싸안고 격려하기보다 못마땅해했다. 이쯤 되면 학대이다. 물론 그 시대에 아동학대 같은 개념은 없었을 테지만, 아버지의 기대에 응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실망감을 느끼게 된 아들과,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아들을 미워하고 만 아버지는 평범한 가정이라도 문제였을 텐데 이들은 왕가의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왕이며, 아들은 세자라는 데서 한층 비극이 깊어졌다.


영조와 세자와의 관계는 이중적 관계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은혜가 중심이었다면, 국왕과 세자와의 관계는 의리가 중심을 이루었다. (……) 영조는 사적인 영역에서 하는 행동과 공적인 영역에서 하는 행동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두 가지가 어우러져 일관성을 갖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세자를 대할 때마다 은혜와 의리가 들쭉날쭉하여 큰 혼란을 빚었다. 그 결과 영조는 세자에게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들을 자주 했다. 영조가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살 수 있는 당당한 세자를 기대할수록 눈앞에 있는 세자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못난이일 뿐이었다. 영조는 자신의 기대를 저버린 세자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차츰 미움으로 변하여 세자를 싫어하게 되었다. 영조는 미워하기 시작하면 지독히 미워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일반의 부모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세자에 대한 미움을 드러내었다. - p.46

영조가 세자를 지나치게 꾸짖으며 자식에 대한 부모의 행동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일들을 서슴없이 하자 세자는 자신에 대한 부왕의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부자간의 성격적 갈등으로 말미암은 정신질환은 결국 세자가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세자의 성격이 결함을 갖게 된 것은 부왕 영조가 지닌 성격적 결함(극도로 치우친 애증 표현, 의리에 대한 강박적 태도)과 적모에게 맡기면 생모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생모에게 맡기면 세자의 체모가 손상된다 하여 어머니의 보호 없이 보모상궁들 손에서 자라게 된 성장배경 때문이었는데, 이 성격적 결함은 영조가 세자의 성격적 결함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사소한 일까지 세자를 심하게 질책한 것, 부왕의 질책에 대해서 세자가 두려움과 공포를 갖게 된 것,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자 세자가 차츰 부왕을 불신하고 반발하게 된 것, 부자 간의 갈등이 극도로 악화됨으로써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 등의 이유로 심각한 질병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자가 못마땅해도 대안이 없었던 영조에게 뜻밖의 선택지가 나타났다. 똑똑한 세손, 즉 미래의 정조의 존재였다. 세자를 통해 채우지 못했던 기대를 세손을 통해 보상받은 영조는 '세자를 포기하고 세손을 선택함으로써' 세자를 죽게 했다. 영조는 '상상을 뛰어넘는 세자 아사 사건을 그의 의리관에 입각하여 치밀하게 진행시키고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이런 질병은 없었고, 병이 든 것은 오히려 모함이며, '집권당에 적대하여 당쟁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고 말았다'는 설도 있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니 사도세자와 적대했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모 세력의 조작일지도 모르겠다(사도세자가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도 하지만). 하지만 사도세자가 진정 패자 쪽이냐고 하기엔 의문이 남는다. 결국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위를 이었고, 그 뒤로도 사도세자의 후손들이 왕이 되었다는 것은 승자 쪽에 가깝지 않을까. 사도세자의 아들로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무작정 '억울한 아버지의 원한을 풀고자' 행동하지는 않았다. 공적으로는 영조의 의리를 따르면서도 사적으로는 생부에 대한 효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할아버지 영조의 의리를 추종하는 세력과 생부 사도세자에 대해 동정론을 주장하는 세력 모두 만족시키고자 했다. 11세에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손에 죽는다는 비극을 겪고 그것을 평생 짊어지면서도, 사건을 마무리지은 후에는 자식으로서 효를 표현하기만 했다. 그렇게 생부에 대한 효성이 깊었다는 정조가 복수의 칼을 빼들지 않았다는 점이(정조의 왕권은 결코 약한 것은 아니었던 듯한데), 역설적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말 억울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의미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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