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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평]혜경궁 홍씨, 회한의 궁중생활 칠십 년
작성자 손여정 등록일 2015.10.30

영조 시대의 조선 12권은 영조 대에서 피해갈 수 없는 인물인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에 대한 책이다. 이 책, <혜경궁 홍씨, 회한의 궁중생활 칠십 년>은 책머리부터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恨中錄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을 걷어내며 시작한다. 한중록은 처음 세상에 소개될 때 한恨이라 옮겨졌으나, '어느 한 많은 여인의 기록'이 아니라 '한가로이 쓴 기록閑中錄' 이라는 것이다. 시아버지의 손에 남편을 잃고, 아들의 손에 친정 가족들을 잃어버린 서글픈 생에 퍽 어색해보이는 한閑은, 자기 감정을 감추는 것이 미덕인 유교적 조선 사회의 작명법에 따르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한다. 그 역설적인 제목 때문에 오히려 더 한이 깊어 보이는 한중록의 저자, 혜경궁은 기본적으로,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 형제와 친정 자손을 위해 이 <한중록>을 썼다. 그렇다면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로, 총명한 사도세자는 정쟁으로 누명을 쓴 억울한 희생자이며 혜경궁은 친정의 편에 서서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악녀일까? 이 책에서 말하는 혜경궁은 '죽을 때까지 남편을 그리워한 열녀도, 남편을 죽인 악녀도 아니다'. '남편을 좇아 자신과 친정의 영화를 기대하다가 그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중간에 갖은 고초를 겪은 여인일 뿐이다(p.8)'.


이 책은 탄생과 성장, 입궐, 남편 사도세자, 정조 키우기, 친정의 몰락, 말년의 위기라는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혜경궁의 삶을 살펴보고 있다. 탄생 부분에는 혜경궁의 선조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는데, 한 마디로 엄청난 명문가다. 선조의 적녀 정명공주와 풍산 홍씨 홍주원의 아들 홍만용은 혜경궁의 고조이자 예조판서, 증조부 홍중기는 사복시 첨정, 큰할아버지 홍석보는 평안도 관찰사, 할아버지 홍현보는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러나 명문이라도, 혹은 명문이라서 집안 내 갈등이 만만찮았다고 한다. 큰할아버지 홍석보가 고조부 홍만용의 연시례(임금이 죽은 사람에게 시호를 내려주면 그 집에서 그것을 축하하여 여는 자리)를 올렸을 때 홍만용의 아들들-즉 홍석보의 삼촌들-이 일절 참가하지 않아 상소가 올라올 정도라는 기록이 남아 있고, 할아버지 홍현보 역시 증조 홍중기의 재산을 큰할아버지 홍석보가 거의 다 물려받아 홍현보가 죽은 뒤 혜경궁의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삼년상이 끝날 즈음에는 끼니를 염려할 정도였다고 한다. 장자 독식의 재산 상속이 대대로 형제간의 불화를 만들어 온 셈이다.

조선과 같은 유교 사회에서 형제간에 다투면서 명문가 행세를 할 수 없었기에 갈등이 있다 해도 미봉하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p.17)고는 하지만, 이쯤 되면 오히려 남이 나아보인다. 실제로 혜경궁의 큰할아버지 홍석보 집안은 혜경궁 집안 못지않은 명문가로, 혜경궁의 집안이 화를 입었을 때조차 홍석보 집안은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으며(홍석보의 아들이자 혜경궁의 큰아버지 홍상한의 아들 홍낙성은 정조 때 영의정을 지냈고, 홍낙성의 동생 홍낙최의 손자 홍현주는 정조와 가순궁 박씨 사이의 딸 숙선옹주의 남편이다) 혜경궁 역시 한중록에서 홍석보의 외손자 김종후, 김종수를 친정의 원수로 기록했다 하니 남보다 못한 혈연이었던 것이다.


한편 여성들의 교양 수준도 상당해서, 혜경궁의 작은어머니 평산 신씨는 편년체의 한국 역사서 역대총목을 한글로 번역할 정도이며, 그녀의 올케가 한글 문학의 명문으로 알려진 의유당 관북유람일기의 작자 의령 남씨이다. 혜경궁 아버지의 외할아버지는 조천 최초의 야담집 천예록의 편찬자 임방이며, 야담집 계서야담의 편찬자 이희평의 할아버지 이산중은 혜경궁을 각별히 아낀 외사촌이다. 앞서 밝혀졌듯 계축일기의 주요 인물인 정명공주가 혜경궁의 선조로, 계축일기는 실제로 혜경궁 집안에 전해오기도 했다. 총명할 뿐 아니라(한중록에 자신이 어렸을 때 얼마나 똑똑한 아이였는지 보여주는 일화 몇 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문화적·학문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소녀는 장래의 국모,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열 살에 입궐했지만 궁 생활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관례를 올리고 맞이한 첫날밤, 영조는 세자의 대리청정을 공표해 버렸고 세자 부부는 충격 속에서 합례를 치러야 했다. 첫 아이 의소가 태어난 달에 영조가 지극히 사랑했던 딸 화평옹주의 삼년상 탈상이 있어 축하받지도 못했고(어느 날 태도가 돌변하여 귀하게 대하기는 했지만) 정조가 태어날 무렵에는 사도세자의 병이 깊었고 영조의 후궁 문씨가 회임하여 세자를 바꾸려 한다는 풍문마저 돌았다. 결국 반역 죄인이 되어 폐위된 사도세자가 죽고, 폐세자빈으로 죄인이 된 혜경궁은 궁 밖으로 나서야 했다. 다행히 연좌 없이 다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아들을 남편처럼 잃지 않기 위해 열한 살 정조를 영조의 곁으로 보내야 했다. 혜경궁과 함께 창경궁에서 머무르다 경희궁의 영조 곁에서 살게 된 정조를 보살핀 것은 할머니 선희궁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여 달라고 영조에게 고했다는 생모 선희궁(영빈 이씨)은 사도세자의 삼년상 탈상달에 죽었다고 하는데, 혜경궁이 머물렀던 궁궐의 공식 일지인 <혜빈궁일기>에 선희궁의 투병 기록(정확히는 선희궁이 아팠다면 있었을 혜경궁의 문안 기록)이 없으며 사망 시점이 공교롭다는 점에서 선희궁의 자살을 의심해볼 수 있다고 한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삼년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효장세자의 아들이 되었는데, 이로써 정조는 완전히 아버지를 잃었고 혜경궁은 계통상으로 아들을 잃었으며, 선희궁 또한 하나뿐인 아들이 완전히 왕통에서 제외되어 아들의 죽음만으로도 괴로웠을 선희궁은 엄청난 마음의 짐을 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며느리와 손자보다 더 괴로웠던 건 틀림없이 아들을 낳은 어머니였을 것이다.

개혁군주라 평가받고 짧지 않은 재위기가 으레 짧았다 아까워해져 독살설이 논해질 정도로 성군 이미지인 정조이지만, 이 정조에게도 일탈의 사춘기가 있었다. 열여덟 정조가 벌이는 기생 놀음에 아들이 남편처럼 엇나갈 것을 두려워한 혜경궁은 아버지 홍봉한에게 부탁해 별감들을 유배 보냈고, 정조는 외할아버지의 조치에 엄청난 분노를 표하며 이 일로 혜경궁의 친정은 정조의 미움을 샀다고 한다. 결국 절대 왕정은 권력자인 제왕과의 친소에 따라 권력이 분배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런 사소하다 볼 수 있는 계기로 몰락이 시작될 수도 있다는 점이 놀랍다(근본적으로는 외척이라 성공한 만큼 외척이라 배격당한 것이겠지만). 그리고 외가를 신원시키려던 아들을 잃고 손자가 왕위에 오르자, 궁궐의 가장 웃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순왕후의 공격으로 혜경궁의 친정은 또 한 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고, 이 때 혜경궁은 친정의 무혐의를 밝히기 위한 회고록, 즉 한중록 집필을 결심하게 된다. 정치적 입지에 따라 왜곡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고종 때 사도세자 신원 문제를 공식적으로 논의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로 언급되었다고 할 정도로 한중록이 제시한 정보의 질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잠깐이지만 끼니를 염려하다 세자빈이 되어 극적인 인생 전환을 이루었으며, 남편을 잃고 아들을 살리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아들 손에 친정이 몰락하는 것을 지켜보고 그 아들마저 먼저 떠나보내고 또다시 친정이 위기에 처하는 것을 보고 장문의 회고록을 집필해 글로써 역사에 남은 여인. 사도세자를 이야기한다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혜경궁에 대해 알게 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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